지난 1편에서는 시간순으로 여행기를 풀어갔지만, 이번 2편부터는 주제별(Theme)로 이야기를 풀어보려 합니다. 시간순으로 나열하다가는 학회 중간중간 제가 땡땡이치고 놀러 다닌 게 너무 적나라하게 들통날 것 같아서요…
1. ICCAD를 향한 여정: 밤샘과 거절의 기록
이번 뮌헨 여행의 진짜 목적, ICCAD 2025 발표에 대한 소회를 먼저 털어봅니다.
🌙 주경야독: 회사 업무와 연구 사이
아이디어의 시작은 회사 업무 중이었습니다. 혼자였다면 논문까지 쓰는 건 엄두도 못 냈겠지만, 마침 회사에 코넬대 박사 과정인 한석님이 인턴으로 계셔서 의기투합할 수 있었습니다.
코딩 자체는 업무와 연관성이 있어 일과 시간에 진행했지만, 논문 작성과 피규어(그림) 작업은 온전히 퇴근 후의 몫이었습니다. 매일 밤 11시, 12시 퇴근은 기본이었고, 좋아하던 운동도 끊어가며 매달렸습니다. 코딩 과정에서 버그 수정이나 추가 실험이 필요했지만, 초반에 잡아둔 방향성이 좋아 큰 무리는 없었습니다.
📉 3전 4기: FPGA, FCCM, 그리고 ICCAD
그렇게 추석 연휴까지 반납하며 밤새 작업한 첫 결과물을 FPGA 2025에 제출했습니다. “이 정도면 잘 썼다"라고 자축하며 저녁을 먹었지만, 결과는 처참했습니다. 리뷰어들의 피드백은 냉혹했습니다. “영어가 이상하다”, “내용이 명확하지 않다…” 열심히 답변서(Rebuttal)를 냈지만, 결국 구두 발표(Oral) 대신 포스터(Poster) 발표로만 수락되어 아쉽게 철회했습니다.
두 번째 도전은 FCCM 2025.
밤을 새워가며 대공사를 했습니다. 기존의 MMM(Module Multiplexing Method)이라는 이름을 CTDM(Chain-Time Division Multiplexing)으로 더 그럴듯하게 바꾸고, 설명과 그림도 싹 뜯어고쳤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또다시 포스터 발표.
이때 한석 님 인턴 기간도 끝나 미국으로 돌아가셨고, 멘탈이 흔들렸습니다. “주제가 약한가?” 싶다가도 “학계가 산업 현장의 치열함을 너무 모른다”며 화가 나기도 했습니다. 포스터라도 할까 고민했지만, 그동안 고생한 게 너무 아까워 포기했습니다.
마지막 도전, ICCAD 2025. 미국에 계신 한석 님과 시차를 극복하며 밤샘 보이스톡으로 논문을 다시 해체하고 조립했습니다. 결과는 최종 합격(Accept)! 알고 보니 세 학회 중 ICCAD가 인지도가 가장 높더군요. 앞선 학회들이 우리 논문의 진가를 몰라봐 줬기에, 더 좋은 곳에 오게 되었다고 정신 승리하기로 했습니다.
[점진적 발전의 기록]
- 📄 Ver.1 (FPGA 25): Draft Link - 패기 넘쳤던 초안
- 📄 Ver.2 (FCCM 2025): Draft Link - 이름까지 바꾸며 발악했던 수정본
- 📄 Ver.3 (ICCAD 2025): Final Link - 마침내 인정받은 최종본
2. D-Day: 떨리는 발표의 순간
드디어 발표 당일. 중간 휴식 없이 4명의 발표자가 연달아 진행하는 세션이었고, 저는 점심 식사 직후 두 번째 순서였습니다. 발표가 끝나면 긴장이 풀려 사진 찍을 정신도 없을 것 같아, 점심시간에 미리 빈 강단에 서서 리허설하는 척 인증샷을 남겼습니다.
😰 전염되는 긴장감
맨 앞자리에서 대기하는데, 첫 번째 발표자(스위스 공대 소속)가 눈에 띄게 떨고 있었습니다. 논문의 3저자쯤 되는 분 같았는데, 아마 1, 2저자가 오기 싫어서 떠넘긴 느낌이랄까요. PPT에는 논문 내용이 빼곡하게 복사-붙여넣기 되어 있었고, 20분 안에 다 읽기도 벅차 보였습니다. 발표자 본인도 그걸 아는지 시간이 갈수록 사시나무 떨듯 떨더군요.
본인 연구였다면 핵심만 짚고 넘길 텐데, 남의 연구를 대신 발표하니 스크립트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겠죠. 그 긴장감이 바로 뒷순서인 제게도 전염되었습니다. 물을 마시려는데 손이 덜덜 떨리더군요.
🎤 머릿속이 하얗게 되다
제 차례가 되었습니다. 전략은 “초반은 완벽하게 외워서 기선 제압, 후반은 스크립트 참고하기”였습니다. 영어 실력이 유창하지 않으니, 문법 실수나 단어 반복을 피하기 위해 초반부를 달달 외웠습니다.
그런데… 시작하자마자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습니다. 연습을 그렇게 많이 했는데 첫 문장이 기억나지 않았습니다. 억지로 내용을 떠올리며 말을 이어갔지만, 이미 단어 몇 개는 빼먹었고 문법이 맞는지도 모를 지경이었습니다. 당황해서 스크립트를 봤지만, 지금 내가 어디를 말하고 있는지 찾을 수도 없었습니다.
‘망했다’ 싶은 순간, 물을 한 모금 마시며 마인드 셋을 다시 했습니다. “어차피 발표 시간 여유롭게 잡았잖아. 천천히 하자. 시간은 내 편이다.”
스스로를 다독이고 나니 조금씩 안정이 찾아왔습니다. 그 뒤로는 준비한 대로 무난하게 마쳤습니다. 오히려 Q&A 시간이 훨씬 편했습니다. 어차피 내가 바닥부터 다 만든 거니까, 어떤 질문이 와도 답변할 내용이 머릿속에 있었거든요. 영어가 조금 서툴러도 ‘내용’을 아니까 자신감이 생기더군요.
발표를 마치고 내려오니, 제 다음 발표자가 너무나 유창하게 청중과 소통하며 발표를 하더군요. “아, 저 사람이 내 앞이었으면 덜 긴장 됐을텐데, 내가 뒤에서 발표했으면 좋았겠다.” 싶으면서도 아쉬움이 남는 건 어쩔 수 없었습니다.
3. BMW 박물관 (BMW Welt & Museum)
여행 계획을 세우며 BMW 본사가 뮌헨에 있다는 걸 뒤늦게 알았습니다. 사실 저는 벤츠(Mercedes-Benz) 오너라 BMW는 딱히 취향이 아니었거든요. 아무래도 ‘근본’ 하면 벤츠 아니겠습니까. (웃음) 특히 요즘 BMW의 거대해진 키드니 그릴은 아무리 봐도 적응이 안 되더라고요.
하지만 막상 BMW 벨트(Welt)에 들어서니 그 웅장함에 압도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곳은 박물관이라기보단 거대한 전시장 느낌인데, BMW뿐만 아니라 롤스로이스(Rolls-Royce)까지 전시되어 있어 위압감이 상당합니다. 팬텀이나 스펙터를 실제로 보니 “와, 저런 건 도대체 누가 타나” 싶으면서도 한 번쯤 타보고 싶다는 욕망이 꿈틀대더군요. 시승이 불가능한데도 수많은 사람이 그 앞에서 사진을 찍는 이유를 알 것 같았습니다.
한편에는 미니(MINI) 전시 공간도 있습니다. 예전에 미니를 탔었는데, 빗길에 끼어드는 차량과 사고가 난 뒤로 제겐 운전 트라우마를 안겨준 애증의 친구입니다. 그래도 작고 가벼워서 카트처럼 스포티한 주행이 가능했던, 운전의 재미만큼은 확실했던 차였습니다. (물론 지금 다시 펀카를 산다면 미니보다는 Z4나 박스터를 살 것 같긴 합니다만, 그래도 귀엽잖아요?)
그리고 시선을 강탈한 M4 컴페티션(Competition) 모델. 와… 보면서 감탄이 절로 나왔습니다. 튀지 않는 회색 컬러였지만, 카본 윙과 반짝이는 알루미늄 휠, 그리고 중앙으로 모여있는 4개의 배기구까지. 그 날렵한 자태는 남자의 심장을 뛰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감탄은 여기까지, 진짜 박물관(Museum) 입장권을 사는데 갑자기 실망감이 밀려왔습니다. 기념으로 간직할만한 티켓이 아니라, 영수증 종이에 달랑 QR코드 하나 찍어 주더군요. 아무리 실용주의 끝판왕인 독일이라지만, 공대생인 저조차도 “이건 너무 감성 없는 거 아니냐” 싶었습니다.
하지만 전시는 영수증과 달랐습니다. 역대 5시리즈의 계보를 쭉 나열한 공간, 벽면을 가득 채운 모터사이클, BMW의 역사가 담긴 모든 엠블럼, 그리고 엘비스 프레슬리가 탔다던 507 로드스터까지. 자동차를 좋아하는 남자들에겐 그야말로 꿈과 환상의 공간이었습니다.
4. 독일 박물관 (Deutsches Museum): 공학이 곧 국가다
제가 소제목을 ‘공학 박물관’이라고 적었지만, 이곳의 정식 명칭은 ‘독일 박물관(Deutsches Museum)’입니다. 그런데 전시를 다 보고 나오면 의문이 듭니다. “이건 그냥 거대한 공학 박물관인데, 왜 이름이 독일 박물관이지?”
아마도 이 이름을 지은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독일 = 공학(Technology)”이라는 등식이 자리 잡고 있는 게 아닐까요? “우리의 공학 기술이 곧 독일을 대표한다"는 그 자부심이 멋지면서도 한편으론 부러웠습니다.
⛰️ 한국 공대생의 설움
우리나라의 공학 대우는 좀 씁쓸합니다. ‘의치한’ 전문직 열풍이나 ‘공돌이’라는 비하 멸칭은 차치하고라도, 대학 캠퍼스 내 공대의 위치만 봐도 알 수 있거든요. 서울대는 공대가 산꼭대기에 유배되어 있고, 입구와 가까운 평지는 예체능이나 인문/경상대가 차지하고 있죠. 제가 다닌 고려대도 지하철역을 기준으로 자연계 캠퍼스는 완전 구석에 있고, 성균관대는 아예 수원으로 유배를 보냅니다. 카이스트나 포스텍 같은 과학 중점 대학은…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그나마 연세대는 공대가 정문 가까이 있는 아주 ‘근본’ 있는 학교입니다. 인정합니다.)
⚔️ 전쟁과 기술의 아이러니
사실 독일의 공학이 이토록 발전한 배경에는 전쟁의 역사가 있습니다. BMW와 벤츠 모두 전쟁 물자를 생산하던 전범 기업의 역사가 있고, 광학의 대명사 자이스(Zeiss) 역시 군용 장비를 공급했으니까요.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서 국가가 “만들어 내라"고 닥달하니,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었겠죠. 비극적인 역사지만, 기술적 관점에서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박물관 내부는 압도적입니다. 들어서자마자 거대한 항공기들이 천장에 매달려 있고, 안쪽으로는 V2 로켓 같은 발사체부터 항공, 선박, 차량용 엔진들이 즐비합니다. 특히 선박용 엔진의 커넥팅 로드(Connecting Rod)는 전시 공간을 꽉 채울 정도로 거대해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습니다.
위층으로 올라가면 화학, 음악, 로봇, 우주, 토목, 바이오까지 공학의 모든 분야가 펼쳐집니다. 특히 광학이나 핵물리 파트에서는 관람객이 직접 원리를 체험해 볼 수 있도록 구성해 둔 점이 인상 깊었습니다. “이래서 독일이 공학 강국이구나"를 몸소 느낄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