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브리스톨의 유령, 얼굴 없는 테러리스트 뱅크시(Banksy)를 찾아서

[Art] 브리스톨의 유령, 얼굴 없는 테러리스트 뱅크시(Banksy)를 찾아서

데미안 허스트가 자본주의를 가장 잘 이용하는 ‘사업가형 예술가’라면, 뱅크시(Banksy)는 자본과 권력을 비웃는 ‘아나키스트형 테러리스트’다.

허스트 다음으로 내가 이토록 열광하는 작가는 단연 뱅크시다. 그의 작품에 깔린 탈권위주의와 아나키스트적인 성향은 나와 묘하게 잘 맞는다. 권위적인 시스템을 조롱하고, 예술을 무겁지 않고 ‘재밌는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그 태도가 마음에 든다.

1. 뱅크시의 고향, 브리스톨(Bristol)의 거친 공기

나는 뱅크시가 너무 좋아 그의 고향이자 초기 활동지인 영국 브리스톨까지 찾아갔었다.

막상 가본 브리스톨의 뒷골목은 생각보다 훨씬 거칠었다. 그래피티가 왜 이곳에서 시작됐는지 단번에 이해가 갈 만큼 동네는 낙후되어 있었고, 밤에는 돌아다니기 무서울 정도로 험악한 분위기였다. 벽이란 벽은 온통 낙서로 뒤덮여 있었다.

2. 반달리즘의 현장: Take the Money and Run

그 거친 분위기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건을 목격했다. 바로 초기작 을 보러 갔을 때였다.

Take the Money and Run 원본

이 작품은 뱅크시와 또 다른 아티스트(Inkie)가 협업한 초기작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내가 갔을 때는 상황이 달랐다.

Take the Money and Run 반달리즘 상태

누군가가 뱅크시의 그림 위에 자신의 그래피티를 덮어버리는 ‘반달리즘(Vandalism)’을 저지른 것이다. 처음엔 안타까웠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 상황이 이해가 갔다.

“뱅크시 형 거 덮어버리고, 그 위에 내 거 그려서 나도 유명해져야지.”

아마 동네의 치기 어린 후배 그래피티 라이터들이 이런 마음으로 덮은 게 아닐까? 길거리 예술의 세계란 원래 그런 것이니까. 영원한 것은 없고, 누군가의 그림 위에 또 다른 그림이 덮이며 역사가 쌓이는 그 거친 생태계를 목격한 기분이었다.

3. 브리스톨 성지순례: 뱅크시를 찾아서

The Mild Mild West

브리스톨의 상징과도 같은 작품이다. 험악한 경찰들에게 화염병 대신 곰 인형을 던지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The Mild Mild West 앞에서

Rose on a Mousetrap

이 작품을 보러 가는 길은 살짝 언덕이 있어서 숨이 찼던 기억이 난다. 도착해서 가장 놀라웠던 건 그림 그 자체보다 ‘보호막’이었다.

Rose on a Mousetrap

집주인이 뱅크시의 그림을 보호하기 위해 투명한 유리 가림막을 설치해 둔 것이다. 솔직히 나라면 어땠을까? “나였으면 저 벽을 통째로 뜯어다가 경매에 팔았을 텐데.” 수억 원은 족히 받을 수 있는 벽을 팔지 않고, 지나가는 모두가 볼 수 있게 사비를 들여 보호막까지 쳐준 주인의 마음이 정말 대단하게 느껴졌다.

Well Hung Lover

높은 건물 벽면에 창문에 매달린 불륜남(?)을 그린 작품이다.

Well Hung Lover

실제로 보니 위치가 정말 높았다. “도대체 저 높이까지 어떻게 올라가서, 밤몰래 저걸 그린 거지?” 뱅크시의 깡과 실행력에 다시 한번 감탄했다.

The Girl with the Pierced Eardrum

페르메이르의 명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패러디한 작품. 귀걸이 대신 벽에 붙은 경보기를 활용한 센스가 돋보였다.

The Girl with the Pierced Eardrum

Queen Ziggy (David Bowie)

여왕의 얼굴에 데이비드 보위의 번개 분장을 입힌 작품이다.

Queen Ziggy

이건 처음에 위치를 찾기가 정말 힘들었다. 골목을 한참 헤매다 발견했을 때의 그 짜릿함이란! 보물찾기를 하는 기분이었다.

The Paint-Pot Angel

브리스톨 미술관(Bristol Museum) 전시와 관련된 작품이다.

The Paint-Pot Angel

천사 조각상 머리에 페인트통을 들이부어 버린 이 작품을 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길거리를 넘어, 점잖은 미술관 안으로 들어가서 페인트를 부어버리는 그 대담함. 기존 예술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뱅크시의 패기가 가장 잘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4. 15억이 300억이 되는 마법: Love is in the Bin

나의 덕심(?)을 확고하게 만든 결정적 사건, 바로 그 유명한 <Love is in the Bin (사랑은 쓰레기통에)> 사건이다. 이 사건은 다시 생각해도 정말 짜릿하다.

2018년 런던 소더비 경매장, 뱅크시의 <Girl with Balloon (풍선과 소녀)>가 경매에 올라왔다. 치열한 경쟁 끝에 104만 파운드(약 15억 원)에 낙찰이 확정되었다.

경매사가 낙찰을 알리는 망치(Hammer)를 " 땅! “ 하고 내려치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어디선가 기계음이 들리더니, 액자 속에 있던 그림이 스르륵 미끄러져 내려오며 국수 가닥처럼 갈리기 시작했다.

Love is in the Bin Shredding Moment
Love is in the Bin Shredding Moment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고 경매장 직원들이 황급히 달려와 그림을 떼어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기계가 중간에 멈추는 바람에 그림은 절반만 파쇄된 상태로 남았다. (나중에는 건전지가 다 되어서 멈췄다는 썰도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훼손된 예술품은 가치가 0원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뱅크시는 달랐다. 이 충격적인 퍼포먼스 자체가 하나의 ‘새로운 예술’로 인정받으며, 작품명은 <Love is in the Bin>으로 바뀌었고 가치는 오히려 폭등했다. 결국 3년 뒤인 2021년, 이 반쯤 갈린 그림은 1,850만 파운드(약 300억 원)에 다시 팔렸다. 15억짜리 그림을 갈아버렸더니 20배가 뛴 것이다.

더 소름 돋는 건 그 직후였다. 사건이 터지자마자 뱅크시는 자신의 유튜브와 인스타그램에 라는 영상을 보란 듯이 업로드했다.

(영상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vxkwRNIZgdY)

영상에는 후드티를 입은 남자가 액자 뒷면에 몰래 파쇄기를 설치하는 과정이 담겨 있었다.

“몇 년 전, 언젠가 경매에 나갈 것을 대비해 몰래 파쇄기를 설치했다.”

그는 이 모든 것을 철저하게 계획했던 것이다. 미술 시장의 정점인 경매장에서, 가장 비싼 값에 팔리는 순간 작품을 스스로 파괴한다. 이토록 완벽한 블랙 코미디가 또 있을까? 그는 정말 미친 천재다.

5. 익명성 뒤에 숨은 진짜 영웅

뱅크시를 처음 알게 된 건 뉴욕 센트럴 파크 가판대 사건(60달러에 진품을 판 사건)이었고, 그를 확실히 각인한 건 소더비 경매장에서 그림을 갈아버린 사건이었다.

하지만 브리스톨에서 그의 흔적을 직접 따라가 보니 그가 단순한 이슈 메이커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는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졌지만, 여전히 얼굴도 이름도 나이도 비공개다. 나는 이 점이 정말 신기하다. 솔직히 나라면 못 참았을 것 같다. 내 작품이 수백억에 팔리고 사람들이 열광하는데 어떻게 나서지 않을 수 있을까? “이거 내가 한 거야!” 라고 소리치며 박수받고 싶은 욕망이 솟구치지 않을까?

하지만 그는 철저히 익명 뒤에 숨어 있다. 어쩌면 그 익명성이야말로 그가 시스템에 먹히지 않고 계속해서 시스템을 공격할 수 있는 무기일지도 모른다. 언젠가 그의 정체가 밝혀질 날이 올까? 팬으로서 궁금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영원히 ‘브리스톨의 유령’으로 남아주길 바라는 마음도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