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피카소를 보고 온 날 할 말을 잃었다: 서울시립미술관 유영국 《산은 내 안에 있다》
63빌딩에 새로 문을 연 퐁피두센터 한화 서울의 개관전 《큐비스트: 시각의 혁신가들》에서 피카소를 잔뜩 보고 온 참이었다. 눈이 이미 배부른 상태였다. 그 길로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에 들렀다. 유영국 전시 《산은 내 안에 있다》. 솔직히 기대는 크지 않았다.
입구에서부터 전시 제목의 타이포그래피가 눈에 들어왔다. 삐침 없이 단단하게, 마치 기하학적인 산을 세워 놓은 것 같은 글자. 앞으로 볼 것들의 성격을 미리 말해 주는 듯했다.
그리고 전시실에 들어선 순간, 할 말을 잃었다.

1. 자기 안의 산(Mountain Within): 같은 제목, 다른 그림
먼저 압도한 것은 색이었다.
빨강 옆에 초록, 파랑 옆에 주황. 서로를 밀어내는 색들이 정사각형 화면 안에서 맞붙어 있는데, 가만히 보고 있으면 그 경계가 미세하게 떨리는 것처럼 느껴진다. 화면 크기도 한몫한다. 1960년대 대작들은 한 변이 135cm쯤 되는 정사각형이라, 앞에 서면 시야를 거의 다 덮어버린다. 색이 눈으로 오는 게 아니라 몸으로 온다.
그다음에 알아차린 것은 제목이었다. 대부분 그냥 〈산〉인데, 그림은 하나도 같지 않다.
바로 앞서 본 피카소와 비교하면 차이가 선명하다. 피카소는 형태를 산산조각 냈지만 끝까지 대상을 놓지 않았다. 큐비즘의 화면에는 여전히 사람이 있고 기타가 있다. 반면 유영국은 도쿄 유학 시절부터 구상 단계를 아예 건너뛰고 처음부터 대상 없이 시작했다. 몬드리안과 장 아르프를 연구하면서. 1930년대에, 조선인 화가가.
평론가들은 그의 화면을 두고 “차가운 논리"라는 말을 자주 쓴다. 자로 잰 듯한 선과 면이 그런 인상을 주니까.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를 그저 ‘색을 대담하게 쓰는, 계산이 정확한 기하학적 추상화가’라고만 생각했다.
“산은 내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 — 그의 묘비에 새겨진 말
밖에 있는 산은 하나지만, 안에 있는 산은 매번 다르다. 같은 제목의 그림이 이렇게까지 다를 수 있는 이유다.
2. 잃어버린 12년: 어부였고, 양조장 주인이었다
전시는 친절하게 시간 순으로 흐르지 않는다. 1964년을 기점으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오는 5부 구성이라, 걷다 보면 이 사람의 인생을 되감았다가 다시 재생하는 기분이 든다. 그 되감기 구간에서 나는 처음으로 걸음이 느려졌다.
유영국은 울진의 대지주 집안에서 태어나 도쿄에서 유화를 배웠고, 스물두 살에 일본 아방가르드 단체에서 최고상을 받았다. 한국인 화가로는 처음이었다. 하지만 태평양전쟁이 격화되면서 1943년 고향으로 돌아왔고, 붓을 놓았다.
그리고 아버지의 배를 물려받아 어부가 되었다. 여기서도 남달랐다. 정보를 모아 어장을 짚어내는 데 능해 인근에서 가장 많은 고기를 잡았다고 한다.
해방 후 그는 서울대 미술대학에서 가르쳤고, 1948년 김환기·이규상과 ‘신사실파’를 만들어 전람회를 열었다. 정말로 붓을 다시 잡은 것이다. 그걸 끊은 것이 전쟁이었다.
전쟁 초기 서울이 점령됐을 때, 그는 공산주의 지도자의 초상화를 그리는 작업에 동원됐다. 그러자 자신은 추상화가라서 초상을 그릴 줄 모른다고 항의했고, 결국 의복 담당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목숨이 오가는 상황에서 나온 항변치고는 지독하게 일관된다.
이후 그는 울진으로 피난해 아버지가 방치해 둔 양조장을 되살렸다. 그가 만든 소주의 이름은 ‘망향소주’였다.
그렇게 어부로, 양조장 주인으로 살아낸 12년. 훌륭한 생존기였지만 화가로서는 통째로 잃어버린 시간이었다. 아내 김기순은 이렇게 회고했다.
“전쟁 겪느라, 어부하느라 남들보다 잃어버린 시간이 너무 많다.”
이 사실을 알고 난 후, 조금 전까지 화려하게만 보이던 색들이 전혀 다른 무게로 다가왔다.
3. 아침 8시 출근, 오후 6시 퇴근: 노동이 된 그림
1955년, 마흔 무렵의 그는 양조장 경영을 남에게 맡기고 서울로 올라온다.

“금산도 싫고 금밭도 싫고 나는 그림이 좋다.”
1964년, 마흔여덟에 첫 개인전을 열었다. 이때 단체 활동을 모두 끊고 교수직에서도 물러나 전업작가가 됐다. (흔히 “사업을 다 접고"라고 하지만, 양조장을 실제로 판 건 1970년대 중반이다. 그 수입이 있었기에 “내 작품은 죽어야 팔릴 것"이라 말하면서도 20년 넘게 안 팔리는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남은 시간을 이렇게 썼다.
하루 10시간. 아침 8시에 작업실로 출근해 오후 6시에 퇴근. 평생 그 규칙을 지켰다. 방문객도 사양했다고 한다. 화가의 낭만 같은 것은 여기 없다. 매일 같은 시간에 캔버스 앞에 앉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문제는 몸이었다. 1976년 심근경색, 이듬해 심장박동기. 말년에는 뇌출혈이 여덟 차례, 입원이 서른일곱 번. 그럼에도 휠체어에 앉아, 산소호흡기에 의지한 채 계속 그렸다.
1970년대 이후 한국 화단이 색을 덜어내는 단색화 쪽으로 기울 때, 유영국은 홀로 빨강과 파랑과 노랑을 쏟아부었다. 그의 그림이 오랫동안 국제 무대에서 덜 알려졌던 이유이자, 지금 다시 발견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 색 앞에서 나는 끓어오르는 용암을 떠올렸다.

4. 〈산-Blue〉(1994): 파랑 하나로 세운 산
전시의 마지막 파트는 ‘무한, 그 너머’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색채와 형태의 긴장이 가장 응축된 방이고, 실제로 관람객이 작품 안으로 걸어 들어간 것처럼 느끼도록 설계돼 있다.
그 방에서 나를 붙잡은 것이 〈산-Blue〉(1994)였다. 바로 옆에는 같은 해에 그린 〈산-Red〉가 나란히 걸려 있다. 하나는 파랑으로, 하나는 빨강으로. 같은 산을 정반대의 온도로 밀어붙인 한 쌍이다.
캔버스에 유채, 280 × 220cm. 앞 방에서 본 1960년대 정사각형 대작들이 한 변 135cm였으니, 그 두 배가 넘는다. 사람 키를 한참 넘어선다. 한 발 물러서지 않으면 전체가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다. 가까이 가면 파랑밖에 없고, 뒤로 물러나야 비로소 산이 선다.
파랑이 평평하지 않다는 것도 그제야 보인다. 깊이가 다른 파랑들이 겹쳐 있어서 산이 화면 뒤로 한없이 물러나는 것처럼 보인다. 액자 안에 산이 들어 있는 게 아니라, 액자가 산의 일부를 잘라 보여주고 있다는 느낌. 나머지는 저 밖에서 계속되고 있을 것 같은.

자를 대고 그은 듯한 직선
이 두 점이 앞선 그림들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선이 반듯하다. 앞 방의 산들이 붓의 흔들림을 그대로 안고 있었다면, 여기서는 자를 대고 그은 것 같은 직선이 화면을 가른다. 색면은 사각형에 가깝게 정리돼 있다.
말레비치가 떠올랐다. 몬드리안도. 실제로 유영국은 1930년대 도쿄에서 몬드리안을 연구했던 사람이니, 60년을 돌아 다시 직선으로 온 셈이다.
그런데 서 있어 보면 전혀 다른 느낌이다. 말레비치와 몬드리안의 사각형은 그 자체가 목적지다. 더 이상 무엇도 가리키지 않는 순수한 형태. 반면 유영국의 사각형은 아무리 반듯해도 여전히 산이다. 직선으로 정리해 놓았는데도 자연의 냄새가 안 빠진다.
저 사각형들 사이에 칠해진 색을 하나하나 뜯어보고 싶었다. 왜 저 자리에 저 파랑이고, 왜 그 옆이 그 색인지. 도록에도, 캡션에도 그 이야기는 없었다. 이건 나중에 따로 찾아봐야겠다.
일흔여덟의 노동
그리고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이 일흔여덟이었다. 심장에 기계를 넣은 지 17년, 뇌출혈을 여러 차례 겪은 뒤. 2.8미터짜리 캔버스는 보는 데도 뒷걸음질이 필요한데, 그걸 채우려면 사다리를 오르내리고 팔을 머리 위로 계속 뻗어야 한다. 웅장하다는 말이 먼저 나오지만, 그 웅장함의 정체는 결국 노동이다.
1960년대 그림들이 폭발이라면 이건 침묵에 가까운데, 이상하게도 더 세다.
그리고 캡션 아래쪽에 적힌 소장처를 보고 한 번 더 멈췄다. 삼성생명.
5. 이병철과 이건희: 뒤늦게 온 인정
1970년대, 삼성 창업주 이병철이 그를 찾아왔다. 국립중앙박물관장 최순우의 권유였다고 한다. 그림값으로 “서울 기와집 한 채 값"을 부르자 이병철이 “한국 사람 그림이 왜 이리 비싸냐"고 물었다.
“한국 사람이 한국 그림을 대접해 주지 않으면 누가 귀하게 여기겠느냐.”
이병철은 그의 1호 컬렉터가 됐다. 유영국의 그림이 본격적으로 팔리기 시작한 것은 예순이 넘어서였다.
아들 이건희는 서울 자택 거실에 유영국의 〈산〉(1968)을 오래 걸어두었다고 한다. 문짝만 한 100호짜리 대작이었다고. 수천 점의 명화를 가진 사람이 정작 자기가 쉬는 공간에 건 그림이었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그 방에서 본 2.8미터짜리 파란 산도, 그 인연의 끝자락 어딘가에 있는 셈이다. 누가 어떤 마음으로 저 그림을 삼성으로 가져갔는지, 사 온 것인지 맡긴 것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팔순을 앞둔 노화가에게 저 크기의 캔버스가 주어졌고, 그가 그걸 파랑으로 다 채웠다는 사실만 남아 있다. 그 사실이 오래 남았다.
“내 작품은 죽어야 팔릴 것이다.” 무명 시절의 이 말은, 다행히 조금 일찍 틀린 말이 되었다.
기대 없이 들어갔다가 두 시간을 채우고 나왔다. 피카소를 보고 온 눈이 배불렀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착각이었다. 배부른 건 눈이었지 마음이 아니었다.
관람 정보
《유영국: 산은 내 안에 있다》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 2026년 10월 25일까지
| 항목 | 내용 |
|---|---|
| 관람료 | 무료. 예약 없이 그냥 가면 된다 |
| 관람시간 | 화–목 10:00–20:00 / 금 10:00–21:00 / 토·일·공휴일 10:00–19:00 |
| 입장 마감 | 관람 종료 1시간 전 |
| 휴관 | 매주 월요일 |
| 가는 길 | 2호선 시청역 10번 출구 도보 4분 / 1호선 시청역 1번 출구 도보 6분 |
| 주차 | 미술관 주차장이 상당히 협소하다. 나도 한참 돌았다. 대중교통을 권한다 |
| 규모 | 유화 115점을 포함해 170여 점. 그중 15점은 이번에 처음 공개된다 |
부록: 유영국 연보 (1916–2003)
본문에서 다 하지 못한 이야기가 여기 있다. 자료마다 연도가 엇갈리는 항목에는 그렇다고 적어 두었다.
연보 펼쳐 보기 (1916–2003)
| 연도 | 사건 |
|---|---|
| 1916 | 울진 출생 |
| 1930년대 초 | 경성제2고보 재학. 일본인 교사 사토 구니오에게 유화를 배움. 교사에게 구타당한 일을 계기로 자퇴 |
| 1935 | 19세, 도쿄 문화학원 유화과 입학. 무라이 마사나리·하세가와 사부로 등 일본 아방가르드와 교류 |
| 1936~1937 | 일본인 동급생들과 N.B.G.(Neo Beaux-Arts Group) 결성. 1937년 제7회 독립미술협회전에 〈랩소디〉로 데뷔(1936년설도 있다). 같은 해 창립된 자유미술가협회 1회전에 김환기·이중섭 등과 참여 |
| 1938 | 문화학원 졸업. 제2회 자유미술가협회전 최고상 수상(〈Work R3〉). 일본 아방가르드 단체에서 최고상을 받은 최초의 한국인 화가 |
| 1938~1942 | 자유미술가협회 회우. 합판을 자르고 붙인 릴리프(부조) 등 다매체 실험 |
| 1940 | 도쿄 동방사진학교 수학, 사진 작품 발표 |
| 1943 | 귀국 |
| 1943~1948 | 울진 죽변에서 어업(선단 경영). 사실상 붓을 놓음 |
| 1947~1950 | 서울대 미대 교원(재직 연도는 자료마다 다르다). 김환기가 주선했다는 서술이 있다 |
| 1948 | 김환기·이규상과 신사실파 결성. 해방 후 국내 최초의 순수 조형 동인. 1949년, 1953년(부산)까지 총 3회 |
| 1950~1955 | 전쟁과 생계로 인한 공백기. 울진에서 양조장 경영. 자기가 만든 소주 이름은 ‘망향소주’ |
| 1955 | 40세 무렵 서울 이주, 작업 재개 |
| 1956 | 모던아트협회 창립·주도(창립을 1957년으로 적는 자료도 있다) |
| 1958~1961 | 조선일보 현대작가초대전 참여 |
| 1960년대 | 홍익대 회화과 교수·학과장(재직 시기 표기가 자료마다 다르다) |
| 1963 | 제7회 상파울루 비엔날레 참가(김환기와 함께). 국제 무대 경험이 전환점 |
| 1964 | 48세에 그해 11월 신문회관에서 첫 개인전. 이후 모든 단체 활동을 중단하고 교수직에서 물러나 전업작가 선언 |
| 1964~1984 | 격년으로 개인전, 총 11회 |
| 1970년대 중반 | 삼성 창업주 이병철이 국립중앙박물관장 추천으로 찾아와 첫 주요 컬렉터가 됨. 60대에 이르러서야 작품이 팔리기 시작 |
| 1975 | 양조장 사업 정리 |
| 1976 | 심근경색. 대한민국예술원상 미술본상 |
| 1977 | 심장박동기 삽입. 등촌동 이주(이후 색은 부드러워지고 산은 둥글어진다) |
| 1979 |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초대 개인전 — 생존 작가 최초.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
| 1982 |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
| 1983~1984 | 심장 수술, 고관절 수술. 1984년 문화훈장(훈격은 확인하지 못했다) |
| 1990 | 『월간미술』 평론가 20인 조사에서 주요 작가 136인 중 예술성 1위 |
| 1990년대 말 | 뇌출혈 8회, 입원 37회. 휠체어와 산소호흡기에 의지한 채 작업 지속 |
| 1994 | 〈산-Blue〉·〈산-Red〉(각 280 × 220cm) |
| 1999 | 마지막 작품 〈Work〉(105 × 105cm) |
| 2002 | 별세. 장례에 3,000여 명 참석 |
| 2003 | 유영국미술문화재단 설립. 2004~2017년 『유영국 저널』 발간 |
참고자료
- 서울시립미술관, 《유영국: 산은 내 안에 있다》 전시 안내 및 서소문본관 이용 안내 — sema.seoul.go.kr
- 국립현대미술관, 《유영국, 절대와 자유》(2016) 전시 페이지 — mmca.go.kr
- 〈산-Blue〉(1994)의 크기·재료·소장처는 전시장 작품 캡션 기준
- 조선일보 「[만물상] 이병철·이건희가 본 유영국」 — 이병철·최순우 일화, 이건희 자택 소장작, 작업 시간
- 컬처램프, 「강렬한 색채 너머, 산이 쌓은 시간 — 《유영국: 산은 내 안에 있다》」 — 전시 5부 구성, 파트 5 전시 공간
- 컬처램프(이태호), 「한국 추상화의 효시, 동해안 울진의 유영국과 신안 안좌 출신 김환기」 — 집안 내력
- 오마이뉴스, 「대성공 사업 접고 48세에 첫 개인전」 / 「“내 작품은 죽어야 팔릴 것” 유영국의 산이 독보적인 이유」 — 어록, 망향소주
- 여성신문, 「심장이 멈춰도 캔버스 앞으로」 — 김기순 회고
- 갤러리현대, 유영국 작가 소개 — “차가운 논리”
- ArtNews, 유영국 관련 서평 — 전쟁기 일화
- Wikipedia, “Yoo Youngkuk” — 어업·양조장 경위 및 매각 시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