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vel] 사라지는 친구를 따라 배를 탔다: 부산에서 대마도 앞바다까지 하룻밤

[Travel] 사라지는 친구를 따라 배를 탔다: 부산에서 대마도 앞바다까지 하룻밤

이 글에는 이해관계가 있다. 친구가 이스턴크루즈의 개발 팀장이고, 그 일을 거들어 달라는 부름을 받고 이 배에 올랐다. 표를 끊고 설레며 올라온 손님과는 출발점이 다르다는 뜻이다. 조타실에 들어가 본 것도, 승무원들 휴대폰을 붙잡고 앉아 있던 것도 보통 승객의 일정은 아니다. 좋았던 것은 좋았다고 쓰겠지만, 읽는 분들은 이 사정을 알고 읽으시면 좋겠다.

1. 일주일 전에 걸려 온 전화: 그리고 사라진 친구

출발 일주일 전에 친구한테 전화가 왔다. 다음 주 토요일에 시간 되냐고 묻더니 그러고는 사라졌다. 무슨 일인지는 월요일이 되도록 말해 주지 않았고, 나는 가는 건지 마는 건지도 모른 채 달력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몇 번을 전화한 끝에야 부산에서 출발하는 크루즈를 타지 않겠냐는 말이 나왔다. 좋다고 했더니 친구는 또 사라졌다. 토요일에 배를 탄다는 사람이 목요일까지 기차표도 안 잡고 일정도 안 알려 주는 상황이었으니, 나는 달력을 보면서도 이게 정말 성사되는 여행인지 아니면 그냥 없던 일이 되는 것인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뒤늦게 기차표를 알아보기 시작했는데 여름 주말에 부산 가는 표가 그렇게 쉽게 나오지 않는다. 새로고침을 한참 하다가 금요일에 내려가고 일요일에 올라오는 표를 겨우 구했다.

2. 옷 몇 개만 주워 담고: 준비 없는 출발

짐은 싸야 하는데 배에서 자는 건 하루고 부산에 하루 먼저 내려가니 2박 3일인데도 챙길 것이 별로 없었다. 가는 길이 심심하지 않게 태블릿 하나를 넣었다.

떠나기 직전까지 표도 없고 일정도 자세히 몰라 제대로 싸지도 못했다. 퇴근하고 집에 들러 옷 몇 개를 주워 담고 수서역으로 나섰다. 부산에 가서 어디서 잘지도 정하지 않은 채였는데, 친척들이 부산에 사시니까 어디라도 잘 곳은 있겠지 하는 생각이었다.

열차 좌석
수서에서 탄 열차

3. 부산역에서 만난 친구: 혼자인 IT팀

부산역에서 친구를 만났는데 얼마 전에 봤을 때보다 폭삭 가 있었다. 회사에 IT팀이 혼자라더니, 나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휴대폰으로 클로드를 붙잡고 코딩을 하고 있었다. 원래 이렇게까지 코딩을 좋아하는 친구가 아니었는데 그 모습이 좀 안타까웠다.

다음 날 다섯 시쯤 배를 타야 해서 멀리는 못 가고 광안리에서 회에 술이나 먹기로 했다. 해변에 도착하니 며칠 뒤에 무슨 행사가 있는지 백사장에 구조물이 잔뜩 서 있었다.

밤의 부산역
밤 아홉 시 사십 분의 부산역

4. 이자카야 세 번 만에: 광안리의 첫날 밤

오는 길에 잡은 숙소에 짐을 던져 놓고 저녁 겸 술을 마시러 나왔다. 맛집이라는 이자카야를 찾아갔더니 대기가 한 시간이었고, 두 번째 집은 회 메뉴가 아예 없었다. 다음 날 그 길을 다시 지나다가 알았는데 우리가 가려던 집은 2층이었다.

그래서 그냥 길에 보이는 다른 집으로 들어갔다. 젊은 사장님이 하는 곳이었는데 음식이 특별하지는 않아서 추천은 못 하겠다. 한참을 돌아다니다 겨우 앉은 탓인지 술이 빨리 들어갔고,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그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회사는 어떤지 이야기를 늘어놓다 보니 어느새 빈 병이 줄줄이 서 있었다. 숙소에 들어가서는 그대로 기절했다.

회 한 접시
광안리에서 시킨 회

5. 부산 풀코스는 실패했다: 국밥과 F1963

다음 날 둘 다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는데, 이야기를 들어 보니 이 친구는 부산에 와서 제대로 구경을 한 적이 없는 것 같았다. 부산에서 태어난 사람으로서 풀코스를 보여 주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일단 해운대 암소갈비를 찾아봤다. 나도 안 가 봤지만 이야기만 듣고 벼르던 집이었는데, 문 연 지 이미 시간이 좀 지났고 가게 주변에 시간을 보낼 곳도 없어서 이 날씨에 갔다가는 몇 시간을 헤맬 것 같아 포기했다. 대신 광안리 해변 쪽 돼지국밥으로 해장을 했다.

그다음은 F1963이었다. 철사를 뽑던 공장을 고쳐 만든 곳이라 초록색 기계들이 카페 한가운데 그대로 서 있고, 사람들은 그 옆에 앉아 커피를 마신다. 택시 기사님도 입구를 못 찾아 우리를 엉뚱한 데 내려 주셨고, 우리도 옆문으로 들어가 한참 헤맸다. 나갈 때는 택시가 들어올 수 있는 길까지 또 한참을 걸어야 했다.

공장 기계가 남은 카페
철사 공장 자리에 들어선 F1963 카페
책장 사이 통로
F1963 안의 서점

친구 옷은 그사이 엉망이 되어 있었다. 백팩을 멘 등에 땀이 말라 소금 꽃이 왕창 피어 있었는데 갈아입을 옷도 없다고 했다. 부산의 팔월이었다.

6. 밀면으로 끝난 점심: 센텀시티에서 헤어지다

날씨만 좋았으면 카페에서 신세계 센텀시티까지 걸어갔을 텐데 걷다가는 죽을 것 같아 택시를 탔다. 카페에는 사람이 별로 없더니 백화점에는 부산 사람이 죄다 와 있는 것 같았다.

점심은 푸드코트 밀면이었다. 풀코스를 보여 주겠다고 해 놓고 백화점 푸드코트라니 미안했지만 차도 없으니 어쩔 수 없었다. 친구 옷 사는 것을 잠깐 같이 둘러보다가 쉽게 끝날 일이 아닌 것 같아 배에서 보자고 하고 헤어졌다.

백화점 통로
사람으로 가득한 신세계 센텀시티

그 길로 할머니 댁에 들러 인사를 드리고 다시 여객터미널로 향했다.

7. 휑한 터미널과 12층짜리 배: 승선

부산항 국제여객터미널에 도착하니 확실히 어딘가로 떠난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내가 아는 버스터미널이나 공항과는 달리 커다란 공간이 휑했다. 취항하는 선사가 둘뿐이고 지금 대기 중인 배도 한 척이라 그런 것 같은데, 그 넓이와 조용함이 묘하게 이질적이었다.

배 안에서 쓸 카드를 받고 출입국 심사와 세관 검사를 거쳤다. 배를 타는데 이렇게까지 하는구나 싶었는데 절차는 공항과 똑같았고 규모와 사람만 작았다. 여권도 당연히 필요했다.

승선 카드
목에 거는 승선 카드

그러고 배를 타러 들어가는데 창밖으로 보이는 크기가 엄청났다. 제주도 갈 때 봤던 조금 큰 여객선 정도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나중에 찾아보니 이스턴 비너스는 총톤수 26,594톤에 길이가 183미터이고 객실만 270개인 배였으니 눈앞의 12층짜리 덩어리가 그렇게 보인 것도 당연했다. 배가 아니라 건물이었다.

대합실 창밖의 배
대합실 창밖에 정박해 있던 이스턴 비너스

8. 내 방과 친구 방: 객실, 그리고 조타실

배에 오르자마자 화려한 로비가 나왔다. 영화에서 보던, 좌우로 둥글게 계단이 돌아 올라가고 가운데가 광장처럼 트인 구조였다. 정말 큰 배구나 싶었고, 남미 공연 복장을 한 직원들이 지나가는 것을 보면서 저분들은 뭘 하는 분들일까 생각했다.

중앙 로비
배에 오르자마자 나온 중앙 로비

방은 생각보다 컸다. 갑판이 있는 층이었고 개별 테라스는 없었지만 침대 둘에 소파까지 있는 창가 자리였다. 오 좋은데, 하고 친구 방에 가 봤다가 충격을 받았다. 개별 테라스가 있고 엄청나게 큰 소파가 있고 화장실에는 욕조까지 있었다. 내 방도 분명 이 방을 보기 전까지는 좋았는데, 하고 속으로 눈물을 훔쳤다.

2인실 객실
바다가 보이는 2인실
테라스가 있는 객실
테라스와 욕조가 있던 친구 방

위층에는 야외 수영장이 있었다. 아직 출항 전이라 물은 조용했고 데크 의자만 줄지어 놓여 있었다.

야외 수영장
출항 전의 갑판 수영장

그러고 친구의 도움을 받아 조정실에 올라가 봤다. 브릿지라고 부른다고 했다. 엄청나게 높은 자리에서 앞이 한눈에 다 보였고, 조정을 위한 장치가 빽빽했다. 일종의 기계실이자 전문 작업실이다 보니 인테리어는 단순했는데 장치들이 주는 분위기가 엄청났다.

조타실
브릿지라고 부르는 조타실

9. 금색 재킷과 장대 곡예: 뷔페와 공연, 그리고 불꽃

배는 다섯 시 이십 분쯤 부두를 떠났다. 갑판에 나가니 부산항대교가 머리 위로 지나갔고, 도시가 천천히 뒤로 밀려났다.

출항
부산항대교를 지나며

저녁 뷔페는 사람이 많아 1부와 2부로 나뉘는데 2부였던 우리는 기다리는 동안 배가 고팠고, 문이 열리자마자 다들 한꺼번에 몰려와 처음에는 한 접시 받는 데 한참이 걸렸다. 창가에 앉아 일몰을 보며 먹으니 그래도 분위기는 좋았다.

뷔페 접시
2부 뷔페에서 받아 온 첫 접시
창가 자리
바다가 보이는 창가 자리

이날은 올나잇 크루즈라 배 안의 맥주와 소주가 전부 무료였다. 밥은 당연히 포함이고 삿포로 같은 좀 좋은 맥주까지 나오니, 잔을 들 때마다 계산을 떠올리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 하나로 배 위의 시간이 꽤 느슨해졌다.

일곱 시 반쯤 하늘이 분홍으로 물들었다. 구름 아래로 부산의 스카이라인이 실루엣으로 깔리고 그 위에 빛이 번지는 동안 갑판에 있던 사람들은 말없이 같은 쪽만 보고 있었다.

분홍빛 하늘
구름 아래로 번지던 노을
노을과 해안선
노을이 남은 부산 해안

공연은 배 안쪽 극장식 홀에서 했다. 천장에는 조명 트러스가 낮게 걸려 있고 무대 뒤 커다란 화면에는 열대 꽃과 야자수가 가득 떠 있었는데, 객석에는 모자를 눌러쓴 어르신과 아이를 데려온 가족과 삼각대를 세워 둔 사람이 섞여 앉아 있었다.

극장식 홀
배 안쪽 홀에서 시작된 공연

금색 재킷에 선글라스를 쓴 남자 가수와 금색 드레스를 입은 여자 가수가 번갈아 노래를 불렀고, 그 앞에서 댄서들이 라틴 리듬에 맞춰 춤을 췄다. 한 사람은 등 뒤로 황금색 날개를 활짝 펼쳐 무대를 돌았다. 화려하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이었다.

분위기가 바뀐 것은 그다음 순서였다. 조명이 붉게 깔리고 무대 앞쪽으로 불길 영상이 올라오더니, 웃통을 벗은 퍼포머가 무대 한가운데 세워진 장대에 매달려 몸을 바닥과 나란하게 뻗었다. 팔 힘만으로 버티는 자세가 한참 이어지는 동안 객석에서 숨소리가 멎었다.

장대 곡예
장대에 매달린 곡예

재미있고 흥미로웠는데 전날 마신 술 때문인지 중간에 졸음이 쏟아져서 방에 내려와 좀 잤다. 그러다 어디선가 펑펑 소리가 나기에 맨 위층으로 올라갔더니 불꽃놀이가 한창이었고, 갑판 수영장에서는 물총 파티가 벌어지고 있었다.

선상 불꽃놀이
갑판에서 터진 불꽃
갑판의 춤
불꽃이 끝나고 이어진 갑판 파티
수영장 파티
야광봉을 든 사람들로 가득한 수영장 데크

10. 선원들 휴대폰에 앱을 깔며: 이 배의 메신저

그 와중에 친구가 코딩을 도와 달라고 해서 친구 방으로 붙잡혀 갔다. 선원들 휴대폰에 테스트 앱을 설치하는 일이었다. 나는 앱이란 배에 타기 전에 완성되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쪽인데, 개발부터 검증과 배포와 인프라까지 혼자 다 하고 있으니 그럴 정신이 있을 리가 없었다.

이 배에만 승무원이 몇백 명이라면서 어떻게 IT팀이 혼자냐고, 알바생이든 컴공 졸업생이든 뽑아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하면서 옆에 붙어 앉았다.

이번에 만든 것은 배 안에서만 쓰는 메신저였다. 바다 한가운데서는 일반적인 무선통신이 제한되니 가족끼리 친구끼리 연락할 방법이 마땅치 않다. 배 안에 서버는 있지만 바깥으로 나가는 회선이 스타링크여서 트래픽이 배 밖으로 새지 않고 선내에서만 돌도록 설계해야 했다는데,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 이 앱이 왜 이 배에만 필요한 물건인지가 분명해졌다. 선내 인터넷을 따로 팔기는 하는데 온 가족이 다 사서 쓰기는 부담이라는 것이 출발점이었다.

이런 것까지 신경을 쓰는구나 싶어 친구가 멋있어 보였다. 카카오를 다니다 이 회사로 옮긴 것이 그냥 옮긴 게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한참을 승무원들과 앱을 테스트하다 보니 시간이 너무 늦어 버렸다. 수영장 물총 파티는 이미 끝나 있었고 정리까지 다 되어 휑했다. 친구를 따라가 VIP 쪽에 킵해 둔 위스키를 마시다가, 결국 배 안에서 라면에 골뱅이무침에 소주로 끝을 봤다.

위스키
VIP 쪽에 킵해 둔 위스키
라면과 소주
배 안에서 먹은 야식

11. 전복죽과 삼진어묵: 아침, 그리고 하선

자는 동안 배는 꽤 멀리까지 다녀왔다. 나중에 휴대폰의 위치 기록을 펼쳐 보니 새벽 한 시 삼십 분에 배가 멈춘 지점이 북위 34.67도, 대마도 북동쪽 바다였다. 이 항차는 섬에 내리지 않으니 배는 두 시가 지나자 뱃머리를 북쪽으로 돌렸고, 여섯 시 반에는 부산 앞바다로 돌아와 있었다.

항적 지도
사진과 위치 기록으로 그린 하룻밤의 항로

아침은 전복죽이었다. 해장으로 그만이었고 맛도 좋았다. 하선 전에는 로비에서 공연팀이 손님들을 배웅했는데, 전날 금색 옷을 입고 춤추던 사람들이 이번에는 은색으로 갈아입고 줄지어 서서 인사하고 있었다.

전복죽
해장으로 먹은 전복죽
배웅
손님들을 배웅하는 공연팀

일요일에 좀 더 놀다 가자고 했더니 이 친구는 배에서 내리고 이십 분 뒤 기차였다. 결국 부두에서 헤어졌다. 나는 이재모 피자를 먹고 싶었는데 일요일이라 문을 열지 않아서, 부산역 앞 삼진어묵을 먹고 올라왔다.

하선
부두에서 올려다본 이스턴 비너스
삼진어묵
부산역 앞에서 먹은 삼진어묵

계획이 없어서 그런지 아쉬움이 남는 여행이긴 했다. 그래도 크루즈를 타 본 것 자체가 재미있었고 특히 선상 파티가 좋았다. 다음에는 기항지에 내려서 돌아다니는 진짜 크루즈를 타 보고 싶다. 출발 전에 친구한테 환전을 해야 하냐고 물어봤던 것이, 다 끝나고 나니 좀 귀엽다.

타기 전에 알아 두면 좋은 것

시각일정
15:30~16:00부산항 국제여객터미널 수속, 출입국 심사와 세관
17:20출항
18:00부산항대교 통과
18:50저녁 뷔페 2부
20:00공연
20:58선상 불꽃놀이, 이어서 갑판 물총 파티
01:30대마도 북동쪽 해상
07:30조식
09:00부산항 입항, 하선

여권이 필요하다. 배를 타지만 절차는 공항과 같아서 출입국 심사와 세관 검사를 거친다.

주류는 무제한이었다. 맥주와 소주가 포함이고 삿포로 같은 것도 나왔다. 조타실 견학은 일반 손님에게는 열려 있지 않다.

이날은 비가 조금 오고 풍랑도 있어서 배가 흔들리긴 했는데, 워낙 큰 배라 멀미가 나지는 않았다.

오버나잇 항차는 부모님과 함께 체험 삼아 타거나 친구끼리 놀러 오기에 좋을 것 같다. 짐은 미리 맡기는 편이 낫고, 승선 전 반나절이 비니 그 시간에 무엇을 할지는 정해 두고 가는 편이 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