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같은 곳은 두 번 가지 않는다”
나는 여행에 있어 확고한 원칙 하나를 가지고 있다. “한번 간 여행지는 다시 가지 않는다.” 세상은 넓고 못 가본 곳은 많은데, 굳이 갔던 곳을 또 갈 필요가 없다는 효율성 주의자다운 생각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 그 원칙이 깨졌다. 직장인이 되어 다시 파리에 오게 된 것이다. 학생 시절, 자전거를 비행기에 싣고 와서 파리 거리를 누볐던 그때는 체력적으로나 재정적으로나 모든 게 ‘하드 모드’였다. 낭만을 좇아 왔지만, 몸이 고되니 파리의 아름다움이 종종 짐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데 다시 만난 파리는 느낌이 사뭇 다르다. 주머니 사정이 나아져서일까, 마음의 여유가 생겨서일까. 예전에는 보이지 않던 ‘낭만’이 비로소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물론 파리는 여전히 지저분하다. 지하철의 냄새, 거리의 쓰레기… 사실 파리는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달라진 건 나다. 학생 때는 그 지저분함에 실망하고 당황했다면, 이제는 “원래 파리가 이렇지, 사람 사는 곳이 다 똑같지” 하며 쿨하게 넘길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올림픽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도시에 남은 활기찬 에너지도 그 지저분함을 잊게 만드는 데 한몫했다.
2. 오페라 가르니에의 저주?
사실 이번 여행의 목적지가 거창한 미술관 투어는 아니었다. 그저 발길 닿는 대로 걷고 싶었다. 하지만 딱 한 곳, 오페라 가르니에(Opera Garnier)만큼은 꼭 들어가 보고 싶었다.
학생 때 왔을 때도 내부 관람을 하러 갔다가 ‘대관 행사’ 때문에 문전박대를 당했었다. “돈 벌어서 다시 오리라” 다짐했는데, 세상에. 이번에도 똑같은 이유로 입장을 못 했다. 통째로 대관 행사가 잡혀 있단다.
두 번의 방문 모두 실패라니. 오페라의 유령이 나를 거부하는 건가 싶어 허탈했지만, 덕분에 계획에 없던 파리의 거리를 더 걷게 되었다. 그리고 그 길 끝에서, 지금 파리에서 가장 핫하다는 공간을 마주하게 되었다.
3. 파리의 새로운 심장: 피노 컬렉션 (Bourse de Commerce)
우연히, 하지만 필연처럼 방문하게 된 곳은 피노 컬렉션(Bourse de Commerce)이다. 혹시 파리 여행을 계획하는 분들이 있다면, 루브르나 오르세만큼 이곳을 리스트에 꼭 넣으라고 추천하고 싶다.
- Who: 구찌(Gucci), 생로랑(Saint Laurent), 발렌시아가 등을 소유한 명품 제국 케링(Kering) 그룹의 회장, 프랑수아 피노가 평생 수집한 현대 미술품을 전시하는 공간이다.
- Space: 옛 상업거래소(곡물 거래소) 건물을 개조했다. 2021년에 개관했으니, 파리의 유적지들 사이에선 ‘신상’인 셈이다.
- Architecture: 건축계의 거장 안도 다다오(Tadao Ando)가 리노베이션을 맡았다.
건물 내부로 들어서면 과거와 현재의 충돌이 눈에 들어온다. 19세기의 고풍스러운 돔 아래, 안도 다다오 특유의 노출 콘크리트 실린더가 묵직하게 자리 잡고 있다. 거친 콘크리트 질감이 화려한 벽화와 묘한 조화를 이루며, 이곳이 현대 미술의 최전선임을 선언하는 듯하다. 운 좋게도 이날은 ‘유럽 문화유산의 날’이라 무료로 입장할 수 있었다.
4. 공간을 집어삼킨 거울: 김수자 (To Breathe - Constellation)
중앙 로툰다(Rotunda)에 들어선 순간, 탄성이 절로 나왔다. 한국 작가 김수자(Kimsooja)의 작품 <To Breathe - Constellation>이 공간 전체를 압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닥 전체에 거울을 깔아, 돔 천장의 빛과 건축물을 그대로 반사시켰다. 발밑을 보면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 같기도 하고, 하늘을 걷는 것 같기도 하다. 단순히 거울을 깔았을 뿐인데, 거대한 건축물의 물성을 지워버리고 무한한 공간감만을 남겼다. 빛과 반영이 만들어내는 어지러움 속에서 관람객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작품의 일부가 되고 있었다.
5. 빛과 어둠의 대비, 그리고 위트
빛으로 가득 찬 로툰다를 지나 가장자리 복도(Passage)로 나오니, 전혀 다른 분위기의 작품 <Deductive Object – Black Garden>이 기다리고 있었다. 칠흑 같은 검은색(마치 반타블랙 같은)으로 칠해진 오브제들은 빛을 완벽하게 흡수해, 입체임에도 평면의 구멍처럼 보이는 기묘한 착시를 일으켰다. 로툰다의 빛과 대비되는 이 어둠의 정원은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반면, 벽 하단 작은 구멍 속에서 웅얼거리는 라이언 갠더(Ryan Gander)의 애니매트로닉스 생쥐는 미술관의 엄숙함을 비웃는 듯한 위트로 관람객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6. 다시 오고 싶은 도시, 파리
지하철에서 한국 드라마를 보는 현지인, K-POP에 맞춰 춤추는 10대들, 그리고 피노 컬렉션의 메인을 장식한 한국 작가까지. 달라진 한국의 위상에 놀라고, 직장인의 여유로 마주한 파리의 낭만에 또 한 번 놀랐다.
오페라 가르니에는 이번에도 못 갔지만, 덕분에 피노 컬렉션이라는 보석을 제대로 즐길 수 있었다. “같은 곳은 두 번 가지 않는다"는 내 원칙을 깨게 만든 파리. 거리는 좀 지저분해도, 그 무질서 속에 흐르는 특유의 로맨틱한 공기는 대체 불가능한 것 같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결혼하면, 신혼여행으로 여기에 다시 와도 좋겠다.” 그때는 부디 오페라 가르니에의 문이 열려 있기를 바라며, 파리에서의 세 번째 만남을 기약해 본다.





